“책임을 피하기 위해 가해자는 망각을 촉진하고, 비밀이 깨지면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는 주디스 허먼의 문장은 단순히 거짓말을 지적하는 표현이 아니다. 이 문장은 1992년 출간된 『트라우마와 회복』에서 폭력과 트라우마가 개인의 기억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반응, 사회적 인정, 권력관계와도 연결될 수 있음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특히 “완전히 침묵시킬 수 없다면 아무도 듣지 않도록 한다”는 이어지는 문장은 말할 기회를 없애는 것과 말의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서로 다른 형태의 침묵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망각’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서 망각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사건을 자연스럽게 잊는 현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허먼이 논의하는 핵심에는 폭력적 사건이 공개적으로 이야기되지 못하거나, 이미 제기된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면서 사회적 기억에서 밀려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즉 사건 자체를 지우는 것뿐 아니라 사건을 말할 수 있는 환경을 약화시키는 것까지 넓게 볼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은 반드시 하나의 명시적인 계획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가 사실을 부인하거나 축소할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이 불편함 때문에 사건을 외면하거나 “이제 그만 이야기하자”고 반응하면서 결과적으로 침묵이 강화될 수도 있다. 따라서 허먼의 논의는 개인 간 상호작용과 그 주변의 사회적 반응을 함께 살펴보도록 만든다.
『트라우마와 회복』에서 이 문장이 등장한 맥락
『트라우마와 회복』은 정신과 의사 주디스 루이스 허먼이 1992년에 발표한 저서로, 가정폭력과 성폭력에서 전쟁 및 정치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형태의 트라우마를 비교하며 기억, 증언, 회복의 문제를 다룬다. 인용된 문장은 책의 초반부에서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려는 힘과 그것을 부정하고 잊으려는 힘 사이의 충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시된다.
따라서 이 문장을 단순한 인간관계 조언이나 “가해자는 언제나 이렇게 행동한다”는 고정된 행동 목록으로 읽는 것은 원래의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다. 저자가 다루는 중심 주제는 심각한 폭력과 트라우마이며, 특히 권력의 불균형이 사건의 인정 여부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데 있다.
이 문장은 특정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다. 폭력과 트라우마를 둘러싼 침묵, 부정, 신뢰성 공격이 어떤 구조를 만들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비밀과 침묵이 첫 번째 방어선이라는 의미
어떤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면 책임을 묻는 과정 자체가 시작되기 어렵다. 그래서 비밀 유지와 침묵은 사실관계를 둘러싼 갈등이 공개적으로 검토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피해자가 말하지 못하거나 주변 사람이 사건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외부의 확인이나 지원도 제한된다.
침묵에는 여러 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할 때마다 조롱하거나 대화를 피하는 방식처럼 간접적인 반응도 생각해볼 수 있다.
- 사건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부인
- 일어난 일을 사소한 문제로 축소하는 반응
-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을 부적절한 행동으로 만드는 분위기
- 과거의 일이라며 논의를 조기에 끝내려는 반응
- 당사자가 말했을 때 발생할 불이익을 강조하는 압박
다만 이러한 반응 하나만으로 의도적인 은폐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각 사건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인 증거와 맥락을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건의 존재가 이미 알려졌다면 논쟁의 초점이 사건 자체에서 말하는 사람의 성격이나 기억 능력으로 이동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장한다”, “원래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는 식의 주장이 등장할 수 있다. 일부 경우 이러한 질문은 사실 확인을 위해 필요한 검토일 수 있지만, 다른 경우에는 사건의 핵심과 무관한 인신공격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증언의 신뢰성을 검토하는 것과 증언자를 공격하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사건의 시간, 장소, 기록, 다른 증언과의 일치 여부 등을 검토하는 것은 사실 확인의 일부다. 반면 사건과 직접 관계없는 인격이나 사회적 평판을 근거로 모든 주장을 무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 구분 | 사실 확인과 관련된 접근 |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방식이 될 수 있는 접근 |
|---|---|---|
| 기억 검토 | 시간·장소·순서를 구체적으로 확인 | 일부 기억 오류만으로 전체 주장을 자동 부정 |
| 자료 확인 | 문서·메시지·기록·다른 증언과 비교 | 관련 없는 사생활이나 평판으로 논점을 이동 |
| 모순 확인 | 불일치가 발생한 이유와 정도를 검토 | 사소한 표현 차이를 고의적 거짓말로 단정 |
| 반론 제시 | 구체적인 사실과 근거를 제시 | 조롱·모욕·낙인을 중심으로 대응 |
“아무도 듣지 않게 한다”는 문장이 중요한 이유
허먼의 문장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물리적으로 말을 막는 것과 사람들이 그 말을 믿지 않도록 만드는 것을 구분한다는 점이다. 누군가 계속 말할 수 있어도 주변 사람들이 처음부터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라고 판단한다면 현실적인 영향은 크게 제한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증언을 둘러싼 갈등에서는 “말할 자유가 있었는가?”만큼 “그 말을 검토할 수 있는 환경이 있었는가?”도 중요한 질문이 된다.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발언이 공정하게 검토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그 내용을 자동으로 사실이라고 인정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듣기와 믿기는 서로 다른 단계이며, 먼저 이야기를 들은 뒤 자료와 맥락을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주변 사람과 사회적 환경은 왜 중요한가?
허먼의 논의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만큼 중요한 존재가 주변 사람들이다. 주변 사람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증언이 공개적인 검토 대상으로 남을 수도 있고, 다시 사적인 문제로 밀려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심각한 사건을 외면하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사건이 너무 불편하거나 충격적일 수도 있고,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며, 관계나 조직의 안정을 깨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작용할 수도 있다.
- 갈등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심리
- 기존 인간관계가 깨질 것이라는 우려
- 권위 있는 사람의 설명을 더 신뢰하는 경향
- 복잡한 사실관계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부담
- 사건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논의를 피하려는 태도
이러한 이유가 있다고 해서 주변 사람이 반드시 사건을 은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회피가 반복되면 결과적으로 증언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관찰점이다.
이 문장을 모든 갈등에 적용하면 안 되는 이유
유명한 심리학적 문장은 복잡한 상황을 간결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지나치게 넓게 적용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누군가 의혹을 부인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동으로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증언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 자체도 항상 부당한 공격은 아니다.
법적·사회적 사실 판단에서는 주장하는 사람과 반박하는 사람 모두의 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세부 내용이 달라질 수 있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건에서는 동일한 상황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부인한다”, “신뢰성을 문제 삼는다”는 행동만으로 가해 여부를 판정하기보다 구체적인 사실, 기록, 독립적인 자료와 전체 맥락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문장을 읽을 때 함께 살펴볼 기준
이 인용문을 현실의 사건에 적용하려 한다면 사람의 성격을 먼저 평가하기보다 정보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편이 유용하다. 누가 말했는지만이 아니라 어떤 내용이 제기되었으며 그 내용에 대한 반론이 무엇인지 구분해야 한다.
- 핵심 주장이 무엇인지 분리한다. 실제로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하는지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살펴본다. 기록, 문서, 메시지, 사진, 독립적인 증언 등이 있는지 확인한다.
- 반론의 내용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사실관계에 대한 반론인지 사람 자체에 대한 공격인지 구분한다.
- 권력관계를 고려한다. 누가 정보와 자원, 조직적 영향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 확인되지 않은 부분은 그대로 남겨둔다.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성급하게 결론을 확정하지 않는다.
기억과 증언, 책임의 관계
주디스 허먼의 문장은 폭력 이후의 갈등이 사건이 발생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누가 기억하고, 누가 말하며, 사회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둘러싸고 계속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비밀 유지에서 시작해 증언자의 신뢰성을 문제 삼는 과정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설명은 트라우마와 사회적 인정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동시에 이 문장을 개별 사건의 유죄 여부를 자동으로 판단하는 공식처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처음부터 무시하지 않는 것과 사실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동시에 가능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침묵이나 선입견으로 결론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기회를 보장하면서도 구체적인 근거와 맥락을 통해 사실을 검토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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